저는 차 안에 십자가를 걸어두지 않습니다. 차량 뒤에 흔히 붙이는 물고기 모양의 크리스천 스티커도 붙이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혹시라도 제가 실수하여 잘못 운전하는 모습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에 누를 끼치게 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이라는 표시를 해놓고 신호를 무시하거나, 난폭하게 운전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불친절하게 행동한다면 사람들은 그 행동 하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이 저렇구나” 하고 여길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제 신앙에는 도움이 된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밝히고 나면, 그에 맞게 살려고 애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사라고 밝히면 교사답게 행동하려 하고, 의사라고 밝히면 의사다운 책임감을 지니려 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알리고 나면, 자연스럽게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데…” 하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습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조금 더 조심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물론 일부러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하고 광고하고 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자연스럽게 신앙이 드러나는 상황이라면 굳이 숨길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순간들이 우리의 영성을 지켜주는 울타리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언젠가 혼자 한국에 다녀오면서 작은 경험을 했습니다. 한국으로 갈 때는 옆자리 분과 짧은 인사 정도만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비행 내내 영화도 보고 이런저런 시간을 보내며 비교적 편안하게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비행기의 분위기는 조금 달랐습니다. 옆자리에는 필리핀의 한 대학에서 물리학(Physics)을 가르치는 크리스천 교수님이 앉으셨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분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려 애쓴다고 하셨습니다. 신실한 믿음이 느껴지는 분이었습니다. 반대편 옆자리에는 베트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프랑스를 거쳐 미국인과 결혼한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대화 중에 자연스럽게 제가 목사라는 사실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제 마음가짐이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영화를 보거나 시간을 흘려보내기보다, 준비해 간 철학 책과 교회에 관한 책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대화할 시간이 주어질 때마다 신앙 이야기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목사로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 고 싶지 않아 솔직히 조금은 긴장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제 마음에는 감사가 가득했습니다.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고, 더 의미 있고 유익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저를 잡아준 것은 다름 아닌 “목사”라는 직분이었습니다. 제 신분이 드러나 있었기에, 그에 맞게 살려고 애썼던 것입니다.

세례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마음에 모셨으면서도 세례받기를 주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직 신앙에 확신이 없거나 준비가 덜 되었다고 느껴서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 마음 한편에는 부담감도 있을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면 이제는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심을 사람들 앞에서 인정하는 셈인데, 예전처럼 내 마음대로 살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부담 말입니다.

사실 그 부담은 틀린 생각이 아닙니다. 세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닙니다. “나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라고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고백하는 신앙의 선언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전과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주저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세례의 축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혼자 있을 때는 쉽게 타협하고, 믿음을 숨기고, 세상과 적당히 섞여 살아가려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나면, 그 고백이 도리어 우리를 붙들어 줍니다.​

“나는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이 한 문장이 우리의 행동을 바꾸고, 선택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바꾸어 갑니다. 그래서 세례는 우리를 얽매는 족쇄가 아니라, 믿음 안에 우리를 붙들어 주는 은혜의 울타리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일부러 신앙을 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야 할 순간에는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우리의 신앙 고백은 다른 사람에게만 들려주는 말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자신의 마음을 향한 고백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임을 인정하는 그 작은 용기가, 우리를 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도록 붙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조금씩 예수님을 닮아 가는 제자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