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가사원장이신 이수관 목사님이 최근 손녀에게 생긴 어려움을 지나며 고난에 대해 묵상한 글입니다. 동일하게 어려움을 당하는 우리에게 시사점을 주는 것이어서 요약하여 싣습니다. 

크리스천에게 고통의 문제는 늘 설명하기 힘든 신정론의 영역에 속합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면 왜 우리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 않으시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적 관점에서의 결론일 뿐,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다른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고통을 피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가장 먼저, 가장 큰 고통을 당하신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사랑 속에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부모가 사랑의 열매로 자녀를 낳듯,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부산물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창조하셨고, 아름다운 우주를 우리의 집으로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창조는 깨어졌고,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고통은 시작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 홍수로 심판하실 만큼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보실 때마다 하나님은 말없이 우셨습니다.

가장 큰 고통은 아들을 내어주신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고난과 수치를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모습을 바라보는 성부 하나님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을 드린 이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이 고통을 없애 주시지 않는가?”가 아니라, “그 고통을 하나님과 함께 지겠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어머니의 장사를 거들 듯,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그분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바울, 그리고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왜 그런 고통이 필요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기까지 채워져야 할 의인의 고난의 분량이 있다는 것입니다(골1:24). 즉, 고통을 당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통은 피하고 싶은 어떤 것이 아니게 됩니다.

그런 주님을 위한 고통에는 몇가지 유익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우리는 고통을 당할 때 그 분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됩니다. 언젠가 개인적으로 너무너무 고통을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하루 종일 펑펑 울었던 것 같습니다. 울음은 그 다음날까지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잊을 만 하면 연신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 날이 수난절 예배가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설교 준비를 하고 올라갔습니다. 그날 십자가를 설교하는데 늘 수난절 설교를 하면서도 그 전에는 그날처럼 알지 못했습니다.

그날은 십자가의 고통이 저에게 깊이 다가왔습니다. 내가 아파보니까 비로서 하나님의 아픔이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배 끝에 헌신을 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고난이 필요하다면 제가 그 고난을 당하겠습니다. 이것이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성찬식을 마치고 일어났는데 모든 고통이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습니다. 신기한 체험이었습니다.두번째 고통의 유익은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씻어주어 순수하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지난 두주간 피붙이가 고통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동안 기도 가운데 모든 회개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눈물은 끊임없이 흘렀고, 나의 숨겨진 모든 면에 대한 성찰과 못 다한 감사와 미루어진 회개가 나왔습니다. 그날 이후 기도의 자리로 돌아올 때 마다 늘 그랬습니다. 

 그리고 나니 내 영혼이 이토록 맑았던 적이 언제였나 싶은 생각이 얼핏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내가 주님 앞에 순수하게 서기를 바라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고통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신지 고민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하는 특별한 선물임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